읍후동교회는 ‘고난의 상징’과도 같은 교회였습니다.
암울했던 일제의 지배를 믿음의 힘으로 견디게 해주었고
분단의 아픔을 몸을 견디어 내다가 폭격에 사라졌습니다.
교회창립 120주년을 맞이하는 고난주일에 사진으로만 남아있던 읍후동 교회의 모형을 성도님들께 공개합니다.
- 일시: 2025년 4월 13일(주일), 주일 2부, 3부 예배 중
- 헌시 낭독과 축소모형 제막식이 예배 중에 있습니다.
- 자세한 내용은 안내지를 참조하여 주시기 바랍니다.
헌시
“원주교회 읍후동예배당 이야기”
< 글/이재춘 낭독/손애란 권사 >
나라를 잃은 식민 백성들에게
무슨 희망인들 있었을까?
어느날
저 멀리 태평양 건너서 이 곳까지 왔다는
푸른 눈의 사나이가 몸짓발짓 해가며
뭐라 뭐라 얘기는 하는데
무슨 말인지 알아 듣기는 하였을까?
아, 놀라워라
그럼에도 초가집 예배당이 세워지고
사람들로 넘쳐남은 무슨 이유였을까?
어찌하여
그 초가는 희망의 터전이 되었을까?
어찌하여
그 초가는 하나님의 집이 되었을까?
어찌하여
그 초가 사람들이 하나님의 사람이라 불리어지게 되었을까?
10년 강산이 한번 바뀌었습니다
초가지붕 뜨문뜨문 보이고 논밭이 즐비한
야트막한 언덕에 빨간벽돌 2층 예배당이 세워졌습니다.
붉은 벽돌 한 장 한 장 마다 눈물이 서려 있었으리라.
그 붉은 벽돌 한 장 한 장 쌓일 때마다
천성을 향한 기도가 울려졌었으리라.
죽어가던 아들을 살려준 서미감병원이 고마웠고
병원을 소개해 준 예수 믿는 사람이 고마워
지금 우리교회 남기선 권사 증조할머니
김신애 님께서
땅 1,200평을 기증했기에 가능했습니다.
2층 건물, 빨간벽돌 예배당에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드나 들었을까?
푸른눈의 사람들을 구경하러도 왔을 것이고
영어 한마디 배우러 왔다가
하나님의 사람이 된 이들은
또 얼마나 많았을까?
원주군 본부면 상동 읍후동에 세워졌다 하여 읍후동예배당이라 불리었고
비록 민족상잔의 비극으로 소실되었지만
35년의 읍후동예배당 역사는
얼마나 많은 것을 담아냈을까?
70평 예배당에서 남자와 여자가 분리되어 예배를 드렸습니다.
우리 나라에서 세 번째로 파이프오르간이 있었던 예배당이기도 했습니다.
그시절 원주에서 나고 자란 사람들 치고 읍후동예배당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을 것이고
한 번쯤은 예배당 문턱을 넘나들었을 것입니다.
푸른눈의 젊은이 그 한사람으로
복음의 씨앗이 뿌려졌고
그 씨앗이 뿌리내려 오늘에 이르렀으니
아, 하나님의 은혜이고 기적이어라
초가지붕 예배당 –
읍후동 예배당 –
지금 여기 예배당 –
하나님은 그 때도 그 곳에 계셨고
지금도
그 한 사람, 그 한 사람 되고자
여기에 모인
우리와 함께 이 곳에 계십니다.